2001-2009 삶의 실존적 지평에 대한 물음

2001-2009 삶의 실존적 지평에 대한 물음

손영실 (서울 시립미술관 큐레이터/ Ph.d Theory of Art Media)

이창훈의 이번 전시는 그간의 작업들을 전체적으로 보여주는 가운데 작가의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의 작업의 기본 전제는 언제나 자연스러운 사고의 흐름 속에서 하나의 주제를 비디오, 설치, 사진 등 여러 가지 매체를 통해 폭 넓게 표현해 내는 것이다. 작가는 어느 하나의 주제나 방법에 천착하기 보다는 변화하는 자신의 관심사를 다양한 매체의 형식으로 담아내는 것이야말로 작업의 필연적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예술적 매체는 그 예술가의 상상력, 생각 등에 구속적 영향력을 가하는 예술가의 생각에 외재(外在)하는 예술적 환경 혹은 조건이다. 예술가의 생각은 곧 가능성을 의미하며 매체의 체계를 변모시키는 예술 행위를 통해 그 사고의 구현 가능성은 증폭된다.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이제는] 방법이다(C’est la méthode qui définit les êtres)” 라는 프랑스의 철학자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의 말처럼, 매체의 변화는 작가의 감수성, 예술적인 개념적 사고의 변화 및 확장과 우리들의 시각 혹은 청각적 감각의 미지의 수용 능력 개발로 이어질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작업들은 주로 독일에서 머문 시기에 제작된 것들로 최근에 제작된 것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시기별로 그의 작업을 분류해보자면 첫번째 시기의 작업의 화두는 ‘경계’에 관한 것들로, 있음과 없음, 거짓과 진실, 빠름과 느림, 허상과 실상, 빛과 그림자와 같은 상반되는 개념을 중심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이 작업들은 일반적으로는 상반된 의미를 지닌 것으로 간주되어지는 두 개념들이 실제로는 완전히 구분된 것이 아니라 사실상 상보적인 측면이 있음을 보여주며 상식의 역설을 피력한다. 일반적으로 규정된 진실과 거짓의 애매한 경계를 허물어 보고자 시도했던 ‘Stone, (Stone)…’은 ‘장자의 나비의 꿈’을 기초로 해서 제작된 작업으로 사물의 특성이나 재질을 바꾸어 인간의 오감에 혼란을 일으키는 방식을 통해 작가가 돌과 같이 보이게 만든 가공된 대상이 언뜻 보기에는 실제의 돌과 구분되지 않는 점에서 실상과 허상의 구분 자체가 모호함을 드러낸다. ‘리베라 메’는 동상을 촬영한 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비디오 작업으로, 정지 영상을 동영상으로 변모시키는 과정에서 동적인 주체(촬영하는 나)와 부동의 객체(촬영되는 동상) 사이의 관계를 전복시키는 가운데,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좌절을 동상의 반복되는 손의 움직임을 통하여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그 다음으로 작가는 ‘삶과 죽음’에 관한 주제로 작업을 하였는데, 삶에 대한 보편적인 측면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점차 하나의 개인으로서의 작가가 삶 속에 느끼는 사소한 감정들에 충실한 양태로 변모되어 갔다. ‘창조’는 인간사의 과정은 초가 타면서 변모해가는 과정과 유사하다는 점에 착안, 삶은 결국 스스로를 소멸하는 과정이며 죽음이라는 결과에서 예외인 사람은 없다는 메시지를 던져준다.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은 늘 선택을 해야 하는 게임과도 같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게임’, 인간은 누구나 ‘무에서 와서 무로 돌아 간다’는 삶의 무상함을 표현한 90분짜리 영상인 ‘무(nothing)’가 있다.
이 시기의 작업이 삶의 허무함 혹은 무상함을 형상화하는데 주력했다면 ‘날아가다’는 옛날 영화를 본 후 영화에 관한 여운과 함께 엔딩 자막을 보며 느낀 감정을 시각화 한 것으로, 출연 배우들이 지금은 노년의 나이에 접어들었거나 고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새들이 날아가듯이 자막에 등장하는 이름들이 하늘로 승천하는 느낌을 오버랩시킨 것이다. ‘앞만 보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뒷모습은 어떨까’ 하는 즉흥적인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비(가시적인)’ 에서는 하루하루의 일상에서 느끼는 사적인 느낌을 자연스럽게 풀어낸다. 이 시기의 작업은 작가가 자신의 삶 속에서 느끼고 생각해오던 것들이 결국은 일반인들 누구나 느껴 볼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에 맞닿아 있다는 점에 천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의 작업은 주로 사진 매체를 중심으로 이뤄졌는데 작가는 ‘섬’, ‘Babelstreet’, ‘A City’에서 현대인들의 일상적인 공간인 집의 창문과 문들을 없애 집을 개인과 사회로부터 고립된 ‘섬’으로 형상화시킨다. 점점 사회와 차단되어 고립되는 자신의 삶에 대한 사고를 바탕으로 작가는 사회와 개인, 개인과 개인을 소통하게 하는 매개로서의 창문과 문 그리고 도로를 지워내는 과정을 통해 현대인의 단절에 관한 문제를 시각화 한다. 여기서 그의 작업의 주요 관점은 하나의 묘사가 현실에 어떻게 집착하는 지에 관한 것으로, 순수한 기록적인 행위를 넘어서 제시, 반영 그리고 담론 등을 포괄한 그의 행위는 문화적 실행에 다가가고 있다.
‘Open Studio-독수공방(獨水空房)’은 작업실에서 작가가 느끼는 감정이 마치 배를 타고 미지로의 모험이 수반된 항해와 유사하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하여 삶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담고 있다. ‘비매품’은 상업성과 실험성 사이에서 작가로서의 갈등과 아이러니를 드러낸 작업으로 ‘팔지 않겠다’라는 단어만을 적어 전시했는데 우연하게도 그림이 판매된 예기치 못한 상황을 기록해서 작업으로 남긴 것으로, 경계에 대한 사고는 그 경계를 넘어서려는 행위와 밀접하게 연관됨을 보여준다. 개념미술의 등장이 시각에 편재되어있던 예술의 패러다임을 아이디어의 측면으로 이끌며 폴 비릴로(Paul Virilo)가 언급했듯이“지각의 전략”의 실효성이 상실됨을 보여주는 가운데 그의 경계에 대한 사고는 예술 그 너머의 예술을 지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창훈의 작업은 폭넓은 경험을 토대로 한 다양한 방법론을 통해 자칫하면 무거워 보일 수 있는 개념적 주제를 “시적인 감성”이라 불리울 수 있는 양태로 표출하는 가운데 삶의 실존적 지평에 물음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