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하는 자아, 이창훈의 실험들

표류하는 자아, 이창훈의 실험들

백곤, 미학

이창훈은 작품을 통해 여러 생각들을 동시에 펼쳐놓는다. 그의 주된 관심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것인데, 그는 사회와 인간사이, 혹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표류하는 정신적인 가치를 찾고자 한다. 그러나 그 가치는 고정된 의미가 아니라 흘러가는 구름처럼 어렴풋이 포착되는 것으로써 이창훈은 이러한 삶에 대한, 인간과 사회에 대한 가치를 물위를 표류하듯 자연스럽게 작품으로 풀어낸다. 표류는 그에게 아주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되는데, 표류한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끌려간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표류는 섬(Island)에서부터 시작된다. 섬이라는 단어는 동경과 고립을 동시에 드러내는데,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외부로부터의 단절은 인간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섬 표면을 표류하게 만든다. 그러나 표류는 시작되는 곳이 이미 상정된 여행이다. 돌아갈 곳이 있는 표류는 섬의 근원을 살피고 확인케 한다. 인간의 실존적 가치 또한 근원을 찾기 위한 끊임없는 표류를 통해 확인된다. 이처럼 이창훈은 인간과 사회의 근본, 혹은 근원을 찾기 위해 여러 가지 실험들을 감행한다. 그가 펼쳐놓는 여러 실험의 흔적들은 그의 작품 곳곳에 묻어있다.

1. 표류(漂流)
그의 2001년부터 2009년까지의 흔적은 독일에서의 유학생활에서 찾을 수 있다. 흔히 유학생활이 그러하듯 그 또한 이방인으로 타문화에 접촉하여, 그 문화를 이해해야하는 고난이 있었다. 이방인의 고립감(Isolation)은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되묻는 과정에서 오는 철저한 고독을 통해 더욱 더 증폭된다. 그는 이러한 고립감을 섬의 개념에 대입시켜 여러 작품들을 표현하였다. 그의 ‘섬’시리즈는 독일의 집들을 사진 찍고 문과 창문을 지워내어 집이라는 형상만을 보여준다. 집이라는 공간은 거주와 드나듦을 통해 의미를 갖는데, 그는 관계를 만들어내는 연결고리를 아예 차단시켜버린다. 이는 단절을 의미한다. ‘Babelstreet’에서는 도시건축물들의 모든 문들을 지워버리고 공허하고 텅 빈 도시에서 홀로 외롭게 집을 찾는 우편배달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노란색 우편배달부는 정처 없이 도시를 배회한다. 그러나 그의 사진은 단절과 도시의 황량함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붉고 노란 지붕의 따뜻함과 흰색의 벽, 컬러풀한 도시의 모습은 생동감 있게 창문 없는 건축물을 화면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고립과 단절의 의미는 그의 사진에서는 고착화된 외로움의 표시가 아니라, 문이 열리기를 바라는 희망의 닫침으로 보인다. 마치 우편배달부가 편지를 전달하면 금방이라도 문과 창문이 생겨나 기쁘게 소식을 받아들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반어법은 매우 효과적이다. 그는 현대사회의 비인간적이고 기계적인 단절을 비판하거나 그것에 메여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고립을 풀어낼 수 있는 관계를 더욱 중요시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닫힌 도시는 따뜻하게 다가온다. 마치 빈 벽에 연필로 창문을 그리면 금방이라도 문이 생겨날 것처럼 말이다.
고립과 단절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A City’에서는 더욱 증폭되어 보인다. 그는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길(road)로 보았다. 비디오 작품인 ‘A City’는 도시의 모든 도로가 사라지고 건물과 건물들이 빽빽하게 붙어있어 마치 컴퓨터회로 부속처럼 보인다. 건물자체로만 이루어진 도시는 섬과 마찬가지로 개별적인 사람들의 고립과 단절을 극대화시킨다. 소통의 부재가 낳은 수많은 건축물들의 회색도시는 순환하는 무한고리처럼 계속해서 섬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도로가 사라진 그의 작품은 섬이라는 단절된 개념보다는 속도를 추구하는 현대사회의 자동차 문화를 과감히 떨쳐버리고 직접 건물과 건물이 맞닿아 그 안에 있는 인간들이 교류를 위해 도시를 재형성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는 ‘섬’시리즈와 마찬가지로 대화와 관계를 위해 중요한 요소들을 제거하거나 닫아놓은 것으로 해석된다. ‘Open Studio-독수공방(獨水空房)’에서는 이러한 소통의 관계를 작가 개인의 실질적인 영역으로 끌고 들어온다. 오랜 독일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들어온 그가 작가로 다시 자리매김 하기 위해 부딪쳐야 하는 여러 가지 상황들은 또다시 그를 고립과 단절의 이방인으로 내몬다. 다가갈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 그리하여 외로운 소통부재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노출시켜 서로 공감하게 만드는 그의 전략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그것은 마치 섬에 표착하기 위한 배를 잃어버린 상황에서 철저히 고립된 삶의 이중적인 모습을 통해 인간, 그리고 작가라는 실존적 의미를 동시에 고민하게 만든다.

2. 실존의 집착
작품 ‘게임’은 주사위가 마모되어 숫자들이 사라지고 동그란 원이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삶과 게임이 비슷하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이 작품은 언제나 선택을 해야 하는 인생의 길이 결국은 원래의 자리, 혹은 없음의 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최근의 작품이 표류라는 개념을 통해 사회,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에 집중하였다면 ‘게임’, ‘날아가다’, ‘비가시적인’, ‘Stone, (Stone)…’, ‘비매품’ 등 이전의 작품들은 삶과 인간의 실존에 대한 직접적인 고민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삶과 죽음, 앞과 뒤, 실재와 허상, 무가치와 가치에 대한 고민으로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의 집착으로 볼 수 있다. ‘날아가다’의 영화 엔딩 크레디트에 마치 새들이 위로 날아가듯 새 이름들을 나열해 놓는다거나, 자신이 걸어가는 길의 뒷모습을 포착하기 위해 카메라로 뒤를 촬영한 ‘비가시적인’이라는 작품이 보여주는 집착은 삶속에서 묻히거나 인식할 수 없는 지점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의 집착은 인간 개인의 내면, 혹은 삶의 근원에 대해 직접적으로 다가간다. 없음을 없음으로 드러내고(‘무’) 허상을 실재 있음의 돌로 만들어내는 과정(‘Stone, (Stone)…’)을 통한 집착은 존재의 조건을 고민하게 함으로써 관념의 틀을 무너뜨린다. 삶의 가치를 무력하게 만드는 허무는 때로는 삶의 진정성을 강렬하게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한다. 이러한 이창훈의 집착은 바로 삶을, 그리고 인간의 존재를 인식하기 위한 예술적인 행위로 작용한다.

3. 영원성의 전복
이창훈은 사회의 프로파간다에 정면으로 다가간다. 그는 기념비조각의 영원성을 살아있는 생명감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하여 그것은 영원성이 아니라 변덕스러운 세속인의 모습과 힘겨워 하는 말들의 신음소리로 탈바꿈된다. ‘무제’(말 동상)는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동상의 고정된 이미지를 탈출하여 힘차게 달려가고픈 말의 욕망을 표현한 것이다. 또한 ‘리베라 메’는 그가 슈투트가르트에서 크리스마스 철에 찍은 사진으로 군중과 작가, 그리고 동상이 들고 있는 월계관을 위트 있게 연결시키고 있다. ‘나를 구원해주소서’라는 리베라 메(Libera Me)는 월계관을 줄 듯 말 듯 한 여신의 모습과 대치되면서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마치 기념비조각의 선전과 이념을 조롱이라도 하듯 살짝 비틀어보는 작가의 실험은 절대자의 가치와 피지배자의 가치,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개인의 삶을 버무려 놓는다. 이는 사회의 프로파간다를 높은 좌대에서 아래로 내려놓고 마주서서 같이 대화하기를 희망한다는 것이다. 동상을 작품의 모티브로 사용하는 그의 작품들은 이와 같이 영속성의 고정을 순간성의 변화로 바꾸어 놓는다.

이처럼 이창훈의 생각이 예술의 영역에서 표출됨으로써 이미지화된 관념은 관객들의 머릿속에서 다시금 정의된다. 일상의 삶에서 힌트를 얻은 그의 작품들은 직접적이지만 촌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다가오는데, 아마도 그것은 하나의 주제에 대한 작가의 지속적인 관심과 연구가 선행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표류의 흔적들을 하나하나 드러내는 그의 실험들은 삶에 대한 집착과 근원을 찾기 위한 여러 실험들로 표현되는데, 이는 마치 문학작품처럼 서사적인 개연성을 갖는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과 작가로 살아가는 것, 그리고 형상과 관념이라는 차원의 경계를 인식하는 것 모두가 타인과 사회의 관계에서 의미화 된다는 것을 상정한 그의 작품은 하나의 큰 의미로 귀결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가치와 삶의 가치가 서로간의 관계와 대화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과 사회의 근원, 그리고 실존적 가치를 찾기 위한 그의 여러 실험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진지하게 그의 작품에 다가가 말을 걸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