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길을 묻다

길 위에서 길을 묻다

신보슬 (토탈미술관 큐레이터, 미학)

도심 한 가운데에나 있을 법한 표지판이었다. 난지 스튜디오 전시동 밖에 뻘쭘하게 놓여 있던 표지판. 종로2가, 을지로 1가, 안국동 사거리 익숙한 지명들이 적혀있는 표지판은 낯익은 듯 낯설었다. 늘 보아오는 표지판이건만, 어딘가 좀 어색한 표지판. 그 표지판 하나가 길을 잃고 표류한다. 길 잃은 표지판의 이야기. 이창훈의 ‘Lost One’s Way-Sweet Story’였다.

‘Lost One’s Way-Sweet Story’의 표지판은 동일한 제목의 비디오 작품을 위해 사용된 일종의 소품이다. 작가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로 이정표를 떼어 해안으로 옮기는 퍼포먼스를 진행하였고, 이 과정을 비디오로 기록하였다. 일반적으로 도시의 표지판은 녹색인데 반해 이창훈의 표지판은 청색으로 제작되었는데, 시각적으로 예민한 관객이라면, 이 작업이 전적으로 계획된 다시 말해, 실제 벌어진 도시 시스템에 대한 개입이나 도전이라기보다는 잘 짜인 각본에 따라 진행된 퍼포먼스라는 사실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이창훈의 작업의 키워드는 지나칠 정도로 분명하다. 에둘러 가지 않는다. 소통과 (삶의, 미래를 향한) 방향성. 직설적이다. 표지판이라는 모티브를 사용하는 것도 이와 닿아 있다. ‘길을 잃다-바다, 숲, 사막’에서 이창훈은 다시 도로 표지판을 가져온다. 그러나 이번에는 표지판 안에 어떤 정보도 담겨져 있지 않다. 마치 미니멀한 회화작품을 보는 듯, 순도 100의 청색, 녹색, 그리고 갈색의 패널뿐이다. 그리고 각각의 표지판에 색깔로부터 연상되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바다/숲/사막. 이창훈은 방향을 알려주고, 길을 알려주어야 하는 표지판의 절대 침묵을 부여했다. 이렇게 부여된 절대 침묵은 관객을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길을 잃은 작가의 모습을 항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2009년 작품인 ‘Babel Street’는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시의 골목에 있는 건물들의 창을 모두 없애 버린 사진 연작 시리즈인데, 이 시리즈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유럽의 오래된 건물들에는 창이 많은 편이다. 일조량이 그리 넉넉하지 못하다 보니, 유럽의 건물에서 창은 대단히 중요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창이 없는 건물들이 들어 찬 골목을 통해서 현대인들의 소통하지 못함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려고 했다. ‘창’이라는 모티프는 직접적으로 ‘소통’이라는 주제에 닿아 있음은 누구에게나 분명하다.

이와 같은 직설적인 화법은 작가의 의도를 분명하게 전달 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작품이 가지는 의미의 층위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키고 일차적으로 만들 수 있으며, 작업이 단순히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소통’이나 ‘(삶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이 작가의 주된 고민이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주제의식을 어떻게 다양하게 풀어낼 수 있으며,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담지할 수 있을 때 작품의 깊이가 더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Lost One’s Way-Sweet Story’는 아쉬움이 크다. ‘도로 표지판’이라는 요소가 가지고 있는 맥락, 그리고 도로에서 떼어 왔다는 설정, 펴포먼스 이런 여타의 요소들이 좀 더 밀도 있게 진행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느 지역의 도료 표지판을 떼어 온 것인지에 따라서 이야기는 다양하게 확산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실제로 표지판을 떼어낸 것인가 아니면 설정에 의한 퍼포먼스인가의 여부에 따라 작품이 놓이게 되는 맥락도 현저하게 달라진다. 물론 이창훈의 작업이 사회적인 언급이나 개입을 말하기 보다는 어찌 보면 개인적인 고민과 갈등, 나아가 작가 본인의 실존의 문제에 닿아 있는 것이기에 이 같은 제안은 작가의 작업이 위치하는 지점의 맥락을 지나치게 다른 방향으로 몰고 나가는 것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작품이 작가의 작업실에서 나와 관객과 마주하는 과정에서 작품 내에 있는 잠재적 가능성들을 의미로 구현하기도 한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지금 언급된 부분들은 이후 적극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특히 ‘소통’이나 ‘방향성’, ‘지표’를 앞으로도 다루려고 한다면, 좀 더 전략적으로 작품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이창훈의 작품들을 보면, 하나의 특정 매체나 주제를 장기적으로 다루는 것 보다는 다양한 장르와 시도들을 섭렵해 가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다. 이러한 작품의 방식은 주어진 상황을 재치 있게 간파하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작가의 고민이나 주제의식을 집중적으로 전개시키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인 측면이 있다. 일례로 ‘Babel Street’의 경우 연작의 형태로 진행되기는 했지만, 2010년 한국에서 국회의사당 건물의 창을 지운 ‘조용한 풍경’으로 단발적으로 보여진 것이 전부이다. 창과 건물, 그리고 거리라는 소재는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다. 그리고 다양한 변주의 과정에서 예상치 않았던 새로운 시각적 실험, 공간적 실험도 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변주의 과정을 통해 좀 더 세련된 시각 언어가 나올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하나의 작품만을 고집하거나 지속해 나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의 성공한 아이템을 무수히 반복하면서 무너져가는 작가들을 많이 보아왔다. 또한 모든 작가들의 작업에서 지금까지 언급했던 사항들이 적용 가능한 것은 아니다. 물론 이창훈의 작품들 중에서도 어떤 작품들은 한번이면 족한 것들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다양한 가능성이 있는 작품들의 경우 좀 더 ‘질기게’ 끌고 가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제안이다. 그저 한번의 시도로는 아직 말하지 못한 것들이 많아 보인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작업실에서 작가 개인의 아이디어나 고민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미래에 대한 불안, 소통의 단절과 같은 현대인들의 고질적인 정서적 결함과 같은 것들을 풀어 나가기 위해서는, 그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이제 길 위에 서서 길을 물어야 할 시점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