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의 장, 그 찰나의 무한공터에서 : 이창훈의 개념조형과 역학에 대하여

인식의 장, 그 찰나의 무한공터에서 : 이창훈의 개념조형과 역학에 대하여

김희진 (현대미술 독립기획자)

이 글은 인간-작가 이창훈의 작업을 관찰하고 그를 향해 거는 나의 첫 말걸기이다. 작가와 나는 전략적인 전시 기획이나 작가론을 의식한 작품 선정, 명제 설정의 부담 없는 비교적 느슨한 세팅에서 만났다. 나는 비록 짧은 만남과 포트폴리오를 통해서지만 그가 지닌 관심과 어법을 그 자체로 음미할 여유를 지닐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창훈이라는 작가가 어떤 관심으로 무엇을 하는 작가인지 찬찬히 기술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작가의 작업 내적인 질서와 고유한 성격을 면밀히 파악하는 일을 나는 그 작가의 총체적 조형을 밝혀내는 일이라 생각한다. 작가의 조형원리에 대한 총체적 파악없는 문화기획은 향기없는 꽃이요, 영혼없는 잔칫상이라 생각한다.

작가 이창훈은 어떤 작가인가. 작업을 보아하니, 작가는 조용하지만 은근히 저항적이고 자신의 원칙에 고지식할 정도로 골똘하며 생각이 복잡하고 언어와 개념에 예민한 사람인 것 같다.
그래서 작업적으로도, 그는 감각과 인식론의 장에서 작업한다. 사람과 작업이 아주 잘 어울린다. 작가는 세상을 길게 응시하며 세상의 외연이라는 가시적 형상 너머의 개념적 실재를 의식하고 있는 작가다. 의식이 그러하니 그 골똘함이 가끔 인간의 존재론이나 실존의식으로 내사되긴 한다. 하지만 그의 목적이 결코 존재의 본질에만 경도된 관념론이나 그에 따른 자전적 실존의식에 골머리를 싸매는데 있진 않다. 그는 인간과 사물의 범주를 넘어서서 모든 존재를 지각하고 인식하게 하는 인간의 장치들과 그 대상이 되는 존재의 추상적 실재 간의 간극을 줄기차게 응시해왔다. 그리고 그는 인간이 지각하고 인식한다는 바로 그 과정, 즉 대상을 감각하는 순간부터 느낌의 형성, 인식의 코드화와 사회적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번역까지가 찰나에 벌어지는 바로 그 “앎의 순간” 자체를 쪼개고 해체해 들여다보며 의심해 왔다. 인간의 앎의 과정에 개입하거나 그것을 결정하는 기재들을 떠올리며, 그의 작업은 인식을 코딩하는 감각체계, 그것을 번역하고 전달하는 (비)언어체계, 인간의 인식을 등재하는 정치경제 체제, 앎의 과정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관계성과 도시환경, 공간의 형태 등의 유무형의 범사회적 기재 agency들로 꾸준히 번져왔다. 이렇게 그의 관심은 인식론의 현상학, 인식론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정도의 궤도에 있다. 예컨대 오감채널에서 압도적 파워를 자랑하는 시각(망막)중심주의와 명목화된 언어가 리드하는 실제의 왜곡, 기호화와 평면화에 따른 실제와의 부정교합, 평행 현실들 간의 상호 소외는 그의 작업 전반에 깔린 질문이다.

여기서 그의 작업을 판독할 때 기본적인 몇 가지 주요 전제가 도출된다. 그는 재현이 아닌 재현의 외피 이면의 실재에 관심이 있는 개념적 미술가다. 그는 정치 사회 경제적 문제들이 아닌 그것을 포괄한 추상적 차원의 언어, 인식, 개념적 현실에 관심이 있다. 그는 영상, 사진, 등의 매체를 활용하고 매체성을 참조해도 근본적으로 언어철학과 관념철학 측면에서 이들을 활용하며, 그의 조형은 주로 이미지와. 텍스트를 근간으로 한 영상, 사진설치로 구현된다.

그렇다면 이창훈 작가의 관심은 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되고 작동하는가. 여기서부터 이창훈 작가의 특성이 도출되는 부분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는 소재주의적이지 않으면서 형이상학적 다이어그램을 촉지적이고 입체적이며 다층적으로 전개해 내는 장점을 지녔다. 우선 소재와의 거리부터 따져보자. 사실 인간의 인식과 물리적 실제 사이의 간극과 이에 대한 언어의 임의적 결속, 사물에 대한 네이밍을 넘어선 실제의 관찰, 실재의 추구 등의 테제는 특히 서구 근현대 미술사에서 보편적인 화의이다. 물론 보편화되었다고 해서 결코 경시될 수 없는 무거운 본질적 화의이다. 마그리트, 마르셀 브루테어스, 초기 김용익의 작업 등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데, 정작 이 화의를 끈질기게, 효과적으로 다루는 작가는 귀하다. 동시대 작가들의 경우는 대부분 작가 자신이 구성한 또 다른 허구적 현실로 화의를 전치시켜 풀어가는 우회로를 택한다. 그러면 임팩트는 있지만 이야기는 셋 길로 새는 꼴이 된다. 이야기만 세는 게 아니라 실제로 화의가 소재의 중력에 끌려 어느새 인식과 감각, 언어, 개념이라는 지층간 긴장이 무너지게 되곤 한다. 반면 이창훈 작가는 아주 클래식한 작가다. 시각적으로 흡입력이 큰 소재를 줄기차게 걷어내면서 마치 체스 게임을 하듯 형이상학 자체의 로직에 밀착해 있다. 그리고 거기에 정밀한 플롯을 포개놓는다.
예컨대 그의 작품 2004년의 “Stone, (Stone)…”을 보자. 이 작품은 두 개의 테이블을 나란히 놓고 한쪽에는 주워온 자연석을 늘어놓고 다른 쪽에는 그것의 복사물을 똑같은 형식으로 정렬해 놓은 작품이다. 흘낏 보면 예술에서 실제와 재현된 실제(미메시스)를 병치시키는 고전적 작품이지만, 작가는 그 해묵은 명제를 해제하는 방식에서 견고하고 건강한 개념적 조형성을 발휘한다. 겉으로 보기엔 두 개의 테이블이 모두 집합적 돌로 묶이지만, 다시 거기에 리얼 돌, 복제한 허구의 돌의 층위가 포개지고, 각 그룹에서 다시 한번 제 각각 보는 재미도 솔솔한 여러 돌 개체들이 반짝이는 식이다. 작가가 던지는 인식, 감각, 물질, 언어에 대한 화의는 안정되게 유지되면서도, 집합으로서의 돌-진짜와 허구의 돌-개별체로서의 돌 세 층위의 존재가 과연 실재는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놓고 아기자기한 각축을 진행하고 있고, 이 세 층위의 존재들이 두 종류 분절단위(하나는 인식-철학, 하나는 물리적 실제-테이블) 경계 사이를 마치 작은 도랑사이에 물이 흘러 다니듯 넘어 다니면서 화의의 입체적 조망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나는 이창훈 특유의 사건과 역학을 알아채게 되었다. 작가는 언어-감각-물질-인식 어느 층위건 그 관념의 지층들 사이를 공통적인 의미나 물질적 유사성을 지닌 요소로 마치 누비이불을 꼬매듯 뜨문뜨문 엮어내고 그 관념화된 지층들 사이에 헐겁고 수평적인 상호 연동과 참조의 숨통들을 둠으로써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명제가 생기있고 입체적인 개념적 회로(일종의 지형)가 되게 한다. 이때 작가는 존재에 대한 이러한 여러 인식의 지층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 결정적인 가치평가를 내리고 있지 않으며, 하나를 구성하는 여럿으로서 서로 유유히 오고가는 수평적 개념의 순환관계가 엮이도록 해준다. 이창훈 작가는 이렇게 언어-인식-감각-물질 사이를 오가는 형이상학과 인식론적 테제로 충분히 철학적이면서도 입체적으로 재미있고 유기적으로 자연스러운 멘탈 사건을 만들 수 있는 작가다.

나는 그의 작업들을 살펴보면서 이러한 개념적 차원의 관심 저변에 어떤 모종의 촉지감과 온기, 질감이 어려있음을 느낄 수 있었는데, 나중에 들은바 작가가 과거에 도예를 배웠다 한다. 어떤 도예수업을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인지 그의 작업 전반에는 간접적으로 질료와 질감에 대한 예민함과 검박한 조형의식, 휴먼 스케일 이내의 반경에서 강점을 발휘하는 밀착도가 깔려있다고 느꼈다. 이것이 반드시 물리적 실물 대상을 도입해야 작업이 좋아지더라는 기계적 결론의 근거는 될 수 없다. 하지만, 이창훈 작업의 드라마가 이미 추상적 인식의 장에서 개념적인 사건의 형태로 전개된다면, (거대하지 않은) 실물의 등장은 사건의 플롯 구성에 입체적인 역동(긴장과 대조)을 주면서 자칫 건조한 탐구를 우연적인 변수(예컨대 작가도 몰랐던 물성의 마술)로까지 튕겨주는 강점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적절한 “물성”이 이창훈 작업에서 매력을 발휘한 예가 있다. 2007년 “리베라 메”는 움직이지 않는 거리의 동상을 자동연속이 아닌 수동 연속샷으로 촬영하여 실제는 신체의 움직임 때문에 흔들린 동상의 이미지를 책으로 묶어 연속적으로 넘겨보면서 마치 부동의 동상이 움직인 것처럼 착시감을 느끼게 하는 작업이다. 여기서 운동성은 물성의 환유적 은유라 할 수 있는데, 이 운동성이 일련의 사건을 끌고 가는 동력임이 분명하다. 이 작품에서 사건은, 일차적으로 무생물인 동상과 생물인 촬영자라는 기호 사이에서 움직임이 역전될 때 일어나고, 다음은 책을 펼쳐보는 독자가 사진들을 휘리릭 넘겨볼 때 일어나고, 동시에 무생물의 유보된 (그러나 잠재되어 있는) 움직임이 실제 애니메이트된다고 느끼는 감각-느낌의 층위에서도 일어난다. 앞선 작품이 “돌”을 둘러싼 언어-감각-물질-인식의 교차순환회로를 이어주는 사건이었다면 이 작품은 “애니메이트”라는 상태를 매개물로 해서 무생물-생물-감각-언어-그것의 수행성까지를 연동시킨 상호 역전과 재생의 연속극과 같다. “리베라 메”나 “Stone, (Stone)…”이나 한결 같이 외적으로는 고요하고 정태적으로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엎치락 뒤치락 쑤욱 쑤욱 매우 유연하고 역동적인 감각, 인식, 뇌의 운동을 촉발하는 작업들이다. 이것이 이창훈 작가의 게임의 룰이고 그가 구성하는 유연하고 아름다운 뇌 지각판의 진동이며 그의 작업이 남기는 여진의 재미이다.

이렇게 볼 때, 작가가 작업을 공간이나 장소의 반경으로 확장한 “섬”(2007)이나 “Between V and R”(2012)은 이창훈의 장기를 살린 사건의 심화라기 보다, 물리적인 외연 확장에 대한 압박을 의식해 빚어진 사건의 대형화, 극화에 그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 경우, 의식의 지층에 집중되야 하는 그의 사건들이 그만 존재론적 벡터가 워낙 방대한 도시 공간에 놓이면서 일종의 체증처럼 (머리에 쥐가 나는 게임이긴 해도) 특유의 미묘하고 아기자기한 긴장미와 역동적 사이클이 반감되어 버리는 것이다. 도로 표지판을 트럭에 실고 표류하다가 낯선 해안가에 임시 설치하는 작업 ”Lost One’s Way-Sweet Story“(2011)의 경우, 작가도 잘 주지하시다시피, 그 모든 여정의 핵심은 이런저런 사람들이 서울 도시 어딘가에서 실어온 낯선 이정표를 바닷가 근처 모래사장에 찔러 세우는 그 해상도 낮은 사진 한 장에 압축적으로 담겨있게 된다. 물론 전 과정에 걸친 여정은 작가에게 미래의 또 다른 단초로 남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도시공간과 장소들(특히 어디나 사건의 장소라 불린 한국 같은 장소들)은 어느 작가의 개념적 플롯팅이건 삼켜버리거니와 무엇보다 이창훈 같은 작가의 작업에 불필요한 상황적 사변들이 들러붙게 만들 수 있다(이창훈의 작업과 사회체제, 도시 시스템을 연결해 보는 비평적 프레임에 나는 솔직히 공감할 수 없었으며, 작가에게 지역과 현실에 대한 구체적, 실질적 개입을 주문한 몇몇 비평적 멘트에도 역시 공감할 수 없었다). 다만, 김종길 비평가가 기술한 대로 바깥을 안으로 뒤집어 넣어 구체적 공간을 개념적 공간으로 환유시킴으로써 추상적 ”경계공간“을 출연시키는 류의 시도 “empty”는 다소 평범해 보이긴 하지만, 그나마 성공적이라 보였다. 이렇다면 2013년 작품 ”PARA S”는 비록 그 조형적 묘미는 떨어지지만 몇 개의 활자를 심플하게 덜어냄으로써 효과적으로 의미와 감각, 인식의 지층들을 교란시키고, 두 개의 공간(천국, 평형 공간?)을 개념적으로 획득, 연동시키는 이창훈 식의 매력이 살아난 작품이라 본다.

작가는 화이트 큐브 내에서 마치 다이어그램처럼 읽히는 자신의 작업을 어떤 차원의 장으로건 확장시켜보려는 고민을 부단히 해온 것 같다. 2011년의 “ob scene”은 역시 어떤 개념-언어에서 시작하되 그것의 재현기호를 공간과 장소가 아닌 이미지 세계로 옮겨서 언어의 연관성을 지닌 영화들을 수집한 후 각 영화를 하나의 프레임 안에 포개버리고 각각의 모니터에 상영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영화에 대한 기억의 감각은 발동시키되 그에 대한 결정론적인 시각 재현 기호는 무화시키고 동시에 미세한 색조와 형상의 미동만으로 대상에 대한 새로운 인지 상태를 호출시키는 작업으로서, 역시 인식론적으로는 매우 복잡한 역학의 작업이다. 기존의 작업에서 언어-감각-물질-인식이 여전히 현실의 차원이라는 단일 차원에 나란히 병치되는 양상이 있다고 느꼈던지, 작가는 이 작품에서 무의식과 시간이라는 비 물질적인차원의 축을 추가하여 게임의 좌표축을 넓혔다. 그간 물리적 공간과 장소에 대해 느꼈던 난관을 추상적 시공간의 차원에서 보합해 낸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쉽사리 호불호를 판단하기 어려운 과제를 작가에게 안겼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디지털세계에서 이미지라는 기호를 도입함으로써 무의식과 감각의 기억, 시간대라는 공간을 얻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유사동종인 단색 추상평면 이미지가 도출됨으로써, 장은 넓어지는게 아니라 다시금 평면으로 소급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도 싶었다. 이는 평면 추상에 대한 선호 여부 보다는, 예전의 다면적이고 입체적인 굴절, 역전, 상통의 다각적 드라마를 보고 싶은 기억에서 나온 아쉬움인지 모르겠다. 군상처럼 늘어선 모니터들의 배열은 물질과 비 물질 차원간 교차순환을 도와주는게 아니라 방해하는 설치요소이기도 했다.

내가 그의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작가는 일련의 달력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의 작업에 대해 쓰면서 생각해 보니, 그가 달력이라는 형태에 도달한 이유를 이해하겠다. 달력은 숫자와 이미지가 일정한 포맷으로 배열되어 시간의 공간성을 이미 함축적으로 표상하는 기호-시간-기억의 장이기 때문이다. 그는 거기서 하나는 전형적 산수 이미지와 숫자 기호에 개입하는 작업으로, 또 하나는 종이에 달력 패턴으로 담배를 놓고 태워 시간의 흔적을 기호로 새기는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후자가 더 매력을 발산할 것이라 기대한다. 그리고 포트폴리오에는 없던 아름다운 드로잉들도 보았다. 그의 드로잉들은 지금까지 그가 펼쳐온 복잡한 게임판에서 한걸음 떨어져 숨을 맘껏 쉬고 있는 생명체들 같았다. 그의 드로잉들은 여태껏 이창훈 작가가 화이트큐브 바깥의 공간과 장소에 대해 느꼈던 모종의 “장”에 대한 지향성이 실은 ‘물성이 살아있는 개념적 입체의 장’을 향한 것이었다는 소견을 확인시켜 주었다. 결과적으로 드러나는 작품 형태 이면에서 아주 복잡하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창훈 작가에게 드로잉은 창작의 원기를 북돋아주고 어쩌면 홀가분한 다른 상상의 해방구를 제공해주는 실마리가 되리라 생각한다.

세 가지 부탁으로 글을 마무리하겠다. 첫째는 글 앞부분에서 주목한 이창훈 특유의 언어-물질-감각-인식간 수평적인 상호 참조, 연동의 순환사유다. 이러한 사유방식은 사실 비서구, 특히 동양철학이나 자연생태철학의 근간에 깔린 사유, 감각체계에 닿아있으리라 생각한다. 작가도 그것을 느꼈을 것이나, 지금까지는 어떤 형식적 분절의 프로토콜에 이끌려 작업했다는 인상이 남아있다. 주체와 객체, 인간과 사물, 안과 밖 등 작가의 서술에서 간간히 등장하는 전형적이고 분절적인 이항대립 관계항들이 그 예이다. 지금까지 그것이 작업하기의 개념적 틀거리로 사용되었을 수 는 있다. 그러나 작가가 전제가 되었던 개념적 틀거리 사이를 교통하거나 융합해버리는 작품이 나오는 것을 목도했다면, 자신의 다른 목소리에도 기회를 주자. 개념을 바꾸는게 아니라, 그 개념을 바라보는 조망권과 방위, 어법을 다르게 해보자는 말이다. 이창훈 작가가 알란 손피스트 같은 생태적 개념미술을 연구해 보면 어떨까도 상상해 본다.
둘째는 개념적 구성에의 관심만큼 작품의 전체적 형태 만들기와 디테일에도 힘을 배분해 주길 바란다. 작업에 워낙 몰두하는 작가라 그것을 담아내는 형식이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굳어버린 생각의 지층에 부드럽게 진동을 일으키는 작업이기 때문에 최종 형태도 규모가 클 필요없이 그만큼의 집중과 여백을 담으면 좋겠다. 집중된 부분에서는 디테일이 반짝이고, 여백에는 담백한 질감이 있으면 좋겠다.
한 가지 활용 가능할 넓은 형태로서, 드로잉, 부드럽지만 깊은 물성감을 지닌 작은 물체들, 사진 이미지를 포함된 종이와 텍스트 작업을 더욱 충분히 시도해 볼 것을 권고한다. 그래서 언어감 좋고 섬세한 이창훈 작가가 종이와 텍스트, 오브제, 이미지를 다면적으로 담기 좋은 그릇은 아티스트 북 작업을 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마지막은 제목 처리다. 제목이 작품을 오도하거나 작품의 깊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이창훈의 작업은 호불호가 명확한 작업이다. 형식적으로 드라마틱하지 않고 감각적으로 말초적인 흥분을 자극하지 않는다. 대신 지그시 오래 생각하며 바라보는 작업이고, 그만큼 의식의 어느 켜에 오래 남아있는 건강한 작업이다. 이러한 이창훈 식 사건을 충분히 사랑하고 즐기는 관객이자 큐레이터로서 드리는 제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