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기호의 구체성

시간 기호의 구체성

안소현 (독립 큐레이터)

기호의 조작

의도이든 아니든 이창훈은 무언가를 가리키는 것, 즉 기호를 다룬다. 사실 어떤 예술도 의미의 진공 상태에 들어갈 수는 없기 때문에(의미를 제거한다는 선언도 의미가 되기 때문에) 모든 예술은 기호이다. 그런데이창훈은기호들이 그대로 얌전하게 작동하게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끊임없이 조작한다.

연못물 속에 “HOPE”라는 단어의 생긴 모양대로 적당한 공간을 만들어 놓고 동전을 몇 개 던져놓으면,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소원을 빌며 동전을 던져넣는다. (<희망>(2015))이 때HOPE라는 기호는이 언어(영어)를 이해하는 구성원들의 약속에 의해 “희망”을 의미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언어는 꽤 강한 사회적 약속의 기호들이라, 임의로 그 의미를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소원을 빌며 동전을 던져넣는 행위에 의해 이 기호에는 다시 의미가 덧붙는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HOPE라는 언어기호가 “희망”이라는 의미를 가리키는 기호작용1에 공공장소의 연못 속의 일정한 공간에 동전이 놓여있으면 “동전을 던지며 소원을 빌라”는 것을 의미하는 기호작용2가 덧붙는 상황이다. 그런데 기호작용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사람들은 2015년 가을 안산이라는 도시에 세월호 분향소가 설치된 미술관에 이 기호를 설치한 사람의 의도가 무엇인지 생각한다. 구체적인 비극적 사건을 떠올리기도 하고, 삶의 전반적인 절망을 떠올리기도 한다. 이 기호를 설치한 사람의 의도가 무엇이건 간에 기호작용3은 현실에서 좀처럼 생략될 수 없다.

정확히 말하면 <희망>에서 기호의의미층은증가할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서로 섞인다. HOPE라는 언어 기호에서기표의 물질적인 부분, 즉 어떤 바탕 위에 쓴 글자의 획들이동시에 동전을 던져넣기 위한 표적의 공간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HOPE라는 언어기호가 가리키는 ‘희망’이라는 기의는 동전을 던져 소원을 비는 행위에 내포된‘희망’이라는 기의와 겹쳐져 두겹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안산의 경기도 미술관이라는 특정 장소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극단적절망의 상황에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희망’이라는 기의와 겹쳐져 세 겹이 된다. 언어기호가 차지하는 물질적 ‘자리’가 ‘공간’이 되어 ‘장소’로 확장되는 과정은 (비록 아주 드문 상황은 아니지만)이창훈이 기호를 조작하는 과정과 그 효과를 잘 보여준다.

시간 상징: 추상적인 시간

이창훈이 즐겨다루는 또 다른 기호는 달력의 숫자들이다. 작가는 달력을 이용한작품들에서도 <희망>의 언어기호와 마찬가지로 기호의 작동에 스며들어 있는 관습이나 규칙, 관성이나 상투성을 이용한다. 평범한 달력에는 엄격한 법칙으로 규정된 날짜와 요일을 나타내는 숫자 기호들이 있다. 그것들은 사회적 합의에 의한 상징 기호들이다. 그리고 달력에는 흔히 매월 다른 이미지들이 있는데, 그 이미지들에는 “달력 사진”이라는 말이 이미 내포하고 있는 상투성이 있다. <달력 –헤테로크로니아>(2015)는 작품이 만들어지는 현 시점으로부터 10년 후의 달력이다. 달력의 숫자는 대부분 현시점의 위치를 확인하거나 특정 시점으로부터 다른 시점까지의 거리를 가늠하는 데 사용되기 때문에 너무 먼 시점(여기서는 10년 후)의 달력은 마치 기호가 가리킬 대상이 너무 멀리 달아나버린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놀랍도록 상투적이고 변하지 않는달력 사진들은 이상한 느낌을 가중시킨다. 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는 척도인 달력의 숫자들과 변하지 않는 이미지 사이의 괴리가 미묘한 이상함을 더하는 것이다. <수평적 리셋>(2015)은 이미지가 고정된 달력에서해마다 달라지는 숫자의 배치를 통해 그런 괴리를 좀더 직접적으로 부각시킨다.

그렇다면 이창훈은 왜 이렇게 달력의 기호들을 조작하는 것일까? 작가는 “헤테로크로니아”라는 제목을 통해 시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직접적으로 표방한다. 하지만 달력 작업에서 이창훈이 다루는 시간은 극히 제한적이다. 우선 이 작업은 시간의 본성에 대한 물음은 아니다.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이 끊임없이 강조했듯 원래 경험의 형식으로서의 순수한 시간, 즉 지속은 일정한 단위로 나뉘어지지 않으며, 우리가 ‘등거리적인’ 공간적 관념을 이용해 연월일시분초 등의 마디로 나눈 것일 뿐이다. 따라서 그 마디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이창훈의 시간에 대한 관념은 시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물론 예술이 이 마디들을유지하면서도 시간의 본성을 탐구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온 카와라(On Kawara)의 작품에서 충분히 증명된 바 있다. 그러나 온 카와라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경외감이 서릴 정도의 일생에 걸친 반복과 지속의 힘과 이창훈이 달력으로 다루는 10년정도의 시간감 사이에는 여전히 큰 차이가 있다. 미리 보는 10년후의 달력이 주는 낯섦은 정확히 말하면 미래의 시간을 경험했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근과거 및 근미래의 예측을 위해 사용하는 달력의 일반적인 용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수평적 리셋>에서 느껴지는 낯섦 역시 상투적인 달력 이미지가 변화를 가리키는 기호로서의 달력의 속성과 어긋나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모순적 시간 경험, 예를 들면 프루스트의 되찾은 시간이나 햄릿이 외치는 “시간은 어긋났다!”와 같은 근본적인 시간의 뒤엉킴을 나타내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정확히 말하면 이 작업은 시간의 본성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인간이 시간을 표기하는 ‘시간 기호’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시간 기호에는 사람들이 엄격한 약속에 의해 규정한 상징들 밖에 없는 것인가?

시간 지표: 구체적인 시간

이창훈의 달력 작업에는 또 다른 종류의 시간 기호가 등장한다. <2014년에 태운 2015년>(2015)에서는 2014년 1월1일부터 12월31일까지 매일매일 담배를 한 대씩 태워 그 재로 종이 위에 2015년의 달력을 만들었다. 달력의 숫자에 의지한다는 점에서는 다른 달력 작업들과 마찬가지지만 매일의 담뱃자국 자체는 어떤 사회적 관습이나 합의도 포함되지 않은 기호이다. 그것은 공간에 남은 물리적 흔적으로, 지표(index)라 부르는 기호이다. 작가는 이전에도 지명과 화살표로 표기된 교통표지판을 엉뚱한 장소에 갖다 놓아 지표의 교란을 일으킨 적이 있는데(<Lost One’s Way-Sweet Story>(2011)), 그것은 언어기호 뿐만 아니라, 직관적인 방향을 가리키는 지표와도 관계가 있었다. 숫자든 담뱃자국이든 매일을 표시한다는 점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이 지표들은 달력의 날짜와 전혀 다른 시간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실제로 그렇게 했든 아니든) 기호를 생산한 사람이 실제로 “거쳐온” 시간, 즉 경험한 시간을 나타낸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기서 기호학에서 말하는 상징기호와 지표기호의 차이점을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달력의 날짜는 관념적이고 추상화된 시간을 나타낸다. 그것은 관념이 이해한 특정한 시간적 크기 내지는 길이이지, 실제로 누군가가 경험한 시간이 아니다. 반면 담뱃재 달력에서는 작가가 실제 경험한 시간의 무게가 다가온다(온 카와라의 작품의 생명을 결정하는 것도 이 무게이다). 누군가가 겪은 시간, 그것이 별다른 사건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해도 그것은달력의 숫자가 “나타내는” 시간과는 다르다. 공간의 길이로 비유하자면 달력에서 1년이라는 숫자를 “1km”라고 표기 한다면, 1년간의 담뱃재는 실제로 1km 길이의 선을 그려놓은 것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의 구체성과 무게를 가진다. 그것은 추상적인 숫자로 대신할 수 없는 물리적 지표들이자삶의 직접성의 무게이다. 감옥의 벽에 그어놓은 날짜 표시가 집집마다 걸린 달력의 숫자와 다른 무게가 다른 것은 시간의 기호가 끌어오는 삶의 무게가 그만큼 다르기 때문이다.

이창훈은 아마도 시간의 지표기호들이 발생시키는 이런 구체성의 무게를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었던 듯하다. <예측 가능한 불확실>(2015)은 칠판을 테이블처럼 놓아두고 작가의 이런 저런 생각들을 적었다 지우는 일을 반복하고, 컵을 놓았던 흔적, 긁힌 자국 등이 그대로 드러나게 만들어 사진으로 기록한 작업이다.칠판을 뉘어 책상을 만든 것이 대단히 독창적인 행위랄 것은 없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사소한 공간적 변화로 인해 칠판이 수용하는 기호들의 종류는 꽤 달라진다.칠판을 벽에 걸어두면 그것은 대부분 누군가를의식한 기호들을 수용하고, 그 기호들은 누군가(작가 자신을 포함)에게 보여주기 위한 메시지를 담고 있으리라는 전제가 형성된다. 반면 테이블로 사용되는 칠판은 의도적인 기호들 외에도 중력의 작용으로 의도치 않게 남은 흔적들, 사용하면서 신체와 닿아 남은 자국들, 즉 지표들을수용하기에 적합하다. 그래서인지 이창훈은 의도적 상징기호인 글씨를 지워버리고 다시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점차칠판을 지표들만 남은 공간으로 만들어간다. 이런 지표들은 매우 직접적이고 단순한 인과성에 기초하고 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상징이 가리키는 추상적인 의미보다 풍부하고 복합적인 정서를 불러온다. 그 기호들은 기호를 만들어내는 사람의 신체와 좀더 밀접한 관계를 갖기 때문에,관념에 주로 의존하는 상징보다 훨씬 구체적이다.

그리고 이번 전시에는 소개되지 않지만 이창훈은이런 공간 속의 흔적을지우고 대신 그 과정만을 기록하는작업을 한 적이 있다. 작가가전시장 벽에7일동안 흰색 페인트를 칠하고 그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한 <칠하거나 지우기(Painting or Erasing)>(2014)나 어느 미술관의 야외 연못에 있던 물을 퍼내 바다로 싣고 가 버리고 바닷물을 실어와 채워넣은 <또 다른 풍경-헤테로토피아>(2014)는공간 속에 식별가능한 흔적들을남겨두지 않지만, 영상이라는 또 다른 종류의 기호를 남긴 것이다. 이때 이창훈이 남긴 영상들은 어떤 의미에서 위의 다른 시간기호들보다 가장 “지표적(indexical)”이다. 그것은 언어적 기호들처럼 어떤 다른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마치 레디 메이드를 전시장에 가져다 놓은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과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가 <지표에 관한 노트(Notes on the Index)>(1부)에서 인용한 마르셀 뒤샹의 구절은 이런 작업들이 갖는 지표성(indexicality)을 가장 선명하게 요약해준다. “중요한 것은 단지 이 타이밍의 문제, 이 스냅샷 효과이다. 그것은 어떤 상황이냐에 상관 없이 무슨 내용이든 한시간을 하는 연설과 마찬가지이다.” 1)(The important thing is just this matter of timing, this snapshot effect, like a speech delivered on no matter what occasion but at such and such an hour.)

이창훈은 추상적 관념의 시간부터 무게가 느껴지는 구체적인 시간, 그리고 흔적이 없지만 과정 그 자체로서의 시간 등 시간기호를 조작하면서 다양화해왔다. 지금 작가는 그 시간 기호들을 모두 실험하는 단계에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 모든 기호에서 예술적 힘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 시간 기호들의 무게는 제각각이며, 덜 관습화되고 덜 추상적인 기호일수록 사람들이 그 앞에서 느끼는 무게는 커진다. 그런 점에서 이창훈이 최근 집중하기 시작한 지표기호들은 삶의 구체성과 직접성을 담고 있어 한층 매력적이다. 관객들은 분명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반복하는 것”보다는 “작가가 실제로 반복한 것”에 끌린다. 그것은 아마도 뒤샹의 레디메이드와 온 카와라의 날짜들이이미 증명한 것일지도 모른다. 시간의 관념을 가장 구체적으로 다루는 것, 그것이 이창훈이 시간 기호들의 실험에서 증명한 하나의 답일 것이다.


1) Rosalind E. Krauss, “Notes on Index” (Part I)(1976), in The Originality of the Avant-Garde and Other Modernist Myths, MIT Press, 1985, p. 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