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의 ‘ob_scene’ 전략: 미학적 ‘간섭’들이 던지는 과제

이창훈의 ‘ob_scene’ 전략: 미학적 ‘간섭’들이 던지는 과제

고동연(미술사)

2012년 신촌 로터리에 위치한 한 건물 옥상 영상 선전 스크린 내부에 이창훈은 영상물을 비췄다. 원래 거대 광고판에는 광고와 시사 뉴스가 돌아가기 마련이다. 대신 이창훈이 대여한 전광판에는 매우 평범해 보이는 한 젊은 남성이 등장한다. 영화 트루먼 쇼에서와 같이 일상적인 인간들에 비하여 거대하게 확대되어져 있는 남성의 시선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인간들을 내려다보듯이 아래쪽을 향하고 있다. 과연 그는 누구일까? 그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이창훈이 제시한 남성의 이미지가 평범하면 평범할수록 호기심은 배가된다.

<V와 R사이>라는 타이틀이 부쳐진 이창훈의 거대 전광판, 영상 프로그램은 작가의 코믹한 제스처가 돋보이는 작업이다.1) 그러나 동시에 전광판 속 남자의 이미지 자체는 도로 위에서 이동 중인 일반인들의 관심을 그다지 끌지 못한다. 전광판의 거대한 스케일과 높이에도 불구하고 신촌 로터리를 이용하는 행인들이 빌딩 옥상에 달려 있는 영상을 쳐다보게 되는 일은 흔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창훈의 간섭은 이와 같이 미묘한 차원에서 일어난다. 동일한 풍경을 찍은 두 개의 사진으로 구성된 <또 다른 풍경>(2014)에서도 풍경의 변화는 쉽게 감지되지 못한다. 작가는 ‘정상적’이고 평온해 보이는 풍경 속에 위치한 연못의 물을 전량 교체하는 수법을 썼다. 혹은<Ob-scene>(2013)에서는 포르노 영상들을 합성하고 낮은 속도로 재생함으로써 기존의 이미지를 최대한 알아볼 수 없도록 해체하였다. 이와 같이 이창훈의 ‘간섭’은 모순되게도 시각적인 경험을 배제하거나 축소, 혹은 미세하게 변형시켜서 진행된다. <또 다른 풍경>에서 두 화면의 차이란 결코 쉽게 시각적으로 감지될 수 없으며, <Ob-scene>에서 작가는 기존의 영상 이미지를 변형시켜서 관객들이 알아차릴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그렇다면 이창훈이 우리의 도시나 자연 풍경을 간섭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는 어떻게 시각 예술가이면서도 관객이 시각적으로 잘 알아차릴 수 없는 방식으로 변형을 꾀하고 있는가? 현대미술에서 이창훈과 같이 ‘숨은 그리 찾기’식의 전략을 사용하는 작가들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관객의 보다 적극적인 참여를 도출해 내고 작업이 가변적인 의미를 지닌 수수께끼처럼 읽히기를 원하는 많은 현대 작가들이 이와 같은 방식을 선호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시각성이 최우선시 되는 현대미술에서 이러한 접근 방식은 작가에게나 관객에게 여러 문제점들을 야기 시킨다. 이에 필자는 이창훈 작업에서 간섭의 전략이 현대미술의 작가들이나 관객들에게 어떠한 과제를 던져주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언급하고자 한다.

풍경을 간섭하다.
이창훈은 기본적으로 풍경을 간섭하는 작가이다. 아니 달리 표현하자면 이창훈의 설치 작업은 풍경 속에서 보아야 제 맛이다. <V와 R사이><또 다른 풍경>의 예술적인 의도를 그 장면, 혹은 풍경 안에 위치한 사람은 결코 인식할 수 없다. 대신 어느 정도 떨어져서 전체 도시 환경이나 자연 풍경 속에서 그의 작업을 바라보아야만 그 일탈의 경로를 비로소 추적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V와 R사이>에서 거대한 영상 이미지를 도심 속의 행인들이 인식해 내기란 쉽지 않다. 이미 도시의 환경은 이미지들로 그득 채워져 있다. 자연스럽게 이창훈의 작업이 관여하고자 하는 바, 즉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기이한 시선을 인식해 내기 위하여 우리는 거리를 두고 그가 만들어내는 풍경 속 일탈을 관찰해야만 한다.

<또 다른 풍경>에서도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물리적인 거리감을 유지해야만 한다. 작가는 소마 미술관 앞뜰의 풍경을 일정 거리를 두고 같은 시각과 같은 각도에서 촬영하였다. 얼핏 보기에 두 풍경 사이의 특별한 차이점은 존재하지 않아 보인다. 대신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미술관 앞 연못의 물을 바닷물로 교체하였다. 작가는 매우 평온해 보이는 푸른 하늘 밑 미술관 앞마당의 사진을 병치해 놓고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시각적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금물의 존재를 암시하고자 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작가가 전 과정을 기록하기는 하였지만 그 변화를 무엇보다도 두 개의 풍경사진으로 집약시키고자 하였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헤테로피아(heterotopia)’라는 부제가 암시하는 바와 같이 결국 작가의 관심이 단순히 소금물을 교체하는 과정보다는 그 이후 만들어진 풍경의 변화에 더 맞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여기서 이창훈 작업의 두 가지 특징이 두드러진다. 첫 번째로 작가는 간섭하는 행위 자체보다는 일탈의 행위가 쉽사리 인식되지 못하는 평온한 일상적 풍경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유사한 맥락에서 2015년 인천 아트플랫폼에 설치된<걱정이나 근심이 없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이나 2013년 <Para s>에서도 ‘파라다이스’이라는 문구의 전구가 부분적으로 끄어져 있어서 일탈된 효과가 만들어지고 있다. 두 번째로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V와 R사이><또 다른 풍경>은 작가의 일탈적인 행위가 이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아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실은 잘 인식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이창훈의 많은 작업들에서 투명실이 사용된다거나 칠하는 과정을 지우는 과정과 동일시하는 대목들은 작가가 ‘드러내기’의 과정을 복합적으로 접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각에 반(反)하다: Ob_scene
최소화된 시각적 기재들을 사용해서 도시나 자연 풍경의 평온함을 깨뜨리려는 작가의 접근 방식은 또 다른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시각 예술작가의 주요 무기 중의 하나가 눈에 보이는 현상을 통하여 우리의 다양한 지적, 미학적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작가가 시각을 다른 공감각과 결합시키는 과정에 주목하고자 한다. 앞에서도 언급한 <Ob-scene>는 원래 영어에서 외설적인 표현의 어원을 시각적으로 풀이하고 개념적으로 구현한 작업이다. ‘외설’은 ‘광경(scene)’에 해당하는 단어와 이를 보는 것을 저지한다는 접두어 ‘ob’을 결합해서 만든 합성어이다. 그러므로 외설은 볼 수 없는, 보아져서는 안될 만큼 금지되어야 하는 이미지라는 뜻을 지칭한다.

작가는 <Ob-scene>을 비롯하여 <I-Frame>(2011)에서 기존의 영상 이미지들을 활용한다. 하지만 언급한 바와 같이 영상 이미지들을 여러 번 겹치고 그것을 재생하는 속도를 달리하면서 작가는 원래 영상 이미지가 지녔던 감수성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치환하느냐를 실험하고 있다. 물론 그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모순된다. 왜냐면 그의 작업과정은 이미지를 보이게 한다기보다는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과정에 더 근접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관객이 이미지를 눈이 아닌 전혀 다른 방식으로 느끼도록 유도하려는 것이 작가의 의도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 인천 아트플랫폼에 설치된 <걱정이나 근심이 없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에서 작가는 일반 문자가 아닌 청각 장애인들을 위한 표기방식을 사용해서 ‘걱정이나 근심이 없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이라는 문구를 빌딩의 입구에 설치하였다. 제목을 보지 않고서 일반인들이 시각장애인들이 사용하는 문자가 지시하는 바를 파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외에도 이창훈의 작업에서 칠하기는 지우기와 동일시된다. 전시장을 비우고 그 흰 벽을 7차례에 걸쳐서 칠하는 과정을 동영상으로 제작한 작업으로부터 소마미술관 빌딩 옥상에 <Para s>라는 ‘파라다이스(paradise)’의 영어 철자 중에서 ‘죽다(die)’를 생략하고 불을 밝힌 작업에 이르기까지 이창훈의 작업에서는 내보이는 것이 아니고 지우거나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변형시키는 과정이 반복되고 있다.

시각성과 시각 예술가의 딜레마
이창훈의 이와 같은 행보는 시각 예술가의 역할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한다. 재차 강조하지만 예술가가 내보이는 것이 아니라 감추거나 잘 안보이게 하고 지우는 등의 행위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1960년대 이후 현대미술에서 지속되어져 온 굳이 새로운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개체를 예술작업으로 치환하기 보다는 매우 간단하고 눈에 띄지 않는 방법을 사용하여 간섭하고자 하는 미학적 전략을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전략은 평온한 일상성에 대한 우리의 소박한 염원을 재고하게 하려는 작가의 예술적 관심사에 비추어 보아서 적절한 전략이다. 검은 밤하늘에 저녁이 되어서야 모습을 드러내는 파라다이스의 영어 철자는 우리로 하여금 낮에는 보이지 않다가 밤이 되어서야 밝혀지게 되면서 사인의 불완전함(파라다이스에서 다이를 뺀 철자의 전구만이 빛을 비추는)을 보여준다. 또한 평온해 보이는 미술관 앞 연못이 채워져 있다는 사실은 일상적인 우리의 도시, 자연 환경 속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스러운 요소들을 상기시켜준다.

그러나 ‘시각성’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현대미술의 작가들에게 시각적인 이미지들을 지우거나 하는 행위는 이율배반적이다. 특히 현대미술이 대중의 관심을 끄는 일이 워낙 적은 상황에서 이와 같은 전략이 보다 적극적인 관객의 참여와 대중적인 기반을 확보하는 데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 파라다이스는 밤이 되어서야 모습을 드러낼 테고 파라다이스의 불완전한 글씨는 관객들이 돌아간 시점이 되어서야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인천 아트플랫폼에 설치된 <걱정이나 근심이 없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은 일반 관객들에게 좌절감을 안겨다 줄 것이다. 문자이기는 한데 무엇을 의미하는지 일반 관객들이 해독해내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또 다른 풍경>과 연관된 각종 사실들이 시각적으로 관객에게 전달되기란 쉽지 않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그저 이해하기 힘든 두 개의 사진이 병치되어 있는 정도로만 인식할 수도 있다. <Ob-scene> 또한 작가의 흥미로운 의도에도 불구하고 감각적인 느낌을 시각적으로 치환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오히려 외설적인 이미지가 사라진 화면은 작가 스스로가 사회가 허용하지 않은 외설적인 이미지들을 검열한 결과로 비춰질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전략적인 간섭이 관객들에게 쉽고 명확하게 읽혀지고 인식될 수 있는 방식들에 대하여 고민해보는 일이 시급해졌다. 이러한 고민은 한편으로는 시각성 보다 개념성을 우위에 두어온 현대미술의 중요한 업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결국 우리 시대 작가들의 중요한 과제가 개념적인 질문들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풀어내는 지에 관한 것임을 다시금 상기시켜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1) V와 R사이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들 사이에서 가상현실, 즉 ‘virtual reality’를 줄여서 부르는 축약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