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세동기 除細動器 Defibrillator

 

『제세동기(Defibrillator)』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진명

이번 전시회 제목은 『제세동기(Defibrillator)』이다. 이 말은 의학용어로서 세동제거기라고도 한다. ‘세동(細動)’은 말 그대로 ‘잔떨림’이다. ‘잔떨림’이 생기면 심장의 심실, 심방이 온전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해서 규칙적인 혈류를 인체에 공급할 수 없게 된다. 생명에 위협적인 부정맥, 심실세동, 무맥성 심실빈맥이라는 치명적 질병이 ‘잔떨림’의 결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잔 떨림’을 정상적으로 잡아주기 위해서는 또 다른 충격이 필요하다. 전기충격이다. 고통에 고통을 가하여 무고통의 일상을 유지시키는 것이 이 서양의학의 핵심이다.

이번 전시회를 기획한 이원호 • 이창훈 • 신형섭 작가는 모두가 서구 미술의 핵심지역에서 활동하다 귀국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제세동기’라는 의학적 기제가 주는 메타포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많이 느껴보았을 것이다. ‘잔떨림’의 원인에 대해서 보통 유전적 요인이나 사회적 관계로부터 받은 스트레스, 나쁜 생활습관 등을 지목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예술계의 세 가지 커다란 축, 즉 제도 • 작가 • 자본가(수장가)도 역시나 ‘잔떨림’ 증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작가에게 주어지는 이 증상의 결과는 매우 참혹하다. 따라서 이 전시는 정상적이지 못한 제도의 구조(world)와 작가라는 자아(Self) 사이의 관계양상을 다시 모색해보자는 실험적 제스처이다.

이번 전시는 매우 이색적인 실험을 감행한다. 14명의 참여작가는 출품작을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보통의 전시라면 갤러리스트나 큐레이터가 작가와 충분한 상의를 통해서 작품을 선별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는 작가가 출품작을 선택한다. (그래서 선별이 아니다.) 더군다나 무시무시한 예비조항이 있다. ‘작품을 전시한 후 전시 종료일까지 판매되지 않은 작품은 갤러리스트와 기획자가 상의해서 알아서 파기시킨다.’ 여기서 작가는 두 가지 전략을 선택할 수 있다. 첫째, 어차피 팔리지 않을 터이니 최악의 작품을 출품한다. 그런데, 이럴 경우 파기될 확률이 더욱 커지고 좋은 소리도 못 듣게 되어 있다. 다만 작업실의 공간이 조금 더 늘어날 뿐이다. 둘째, 파기될 확률이 있기에 최고의 작품을 선택한다. 최고의 작품일지라도 가격을 더 낮춘다. 자기 작품이 파기되는 일은 분명 불명예다. 싸게라도 팔리면 명예를 지키면서 조금일지언정 자본까지 건지게 된다. 그러나 끝까지 판매되지 않을 때 자기 에이스를 스스로 죽이는 정신적 고통에 빠지게 된다. 이 둘 중 무엇을 선택하더라도 심한 충격을 강요 받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충격을 감내하려는 작가들의 태도는 매우 숭고한 것이다. 여기에 희망이 있다.

이 전시가 추구하는 표면적 이치는 위와 같다. 제도 • 작가 • 자본 간에 보이지 않는 끈끈하고도 지독히 질긴 거미줄의 구조를 머릿속에 그려보자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는 철학자 헤겔이 『정신현상학』을 저술한 목적을 연상시킨다. 자아가 진정한 앎에 이르기 위해서 처음에 반드시 자기 부정(self-denying)이 필요하다. 그 부정의 다음에 오는 결과는 반성적인 자기 앎(retrospective self-knowing)이다. 자아는 외부적 가치의 기준을 향해 돌진하며 모조리 채찍질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반란의 과정을 통해서 얻게 되는 교훈이 있다. 반란은 무용하고 잘못간 길이라는 것이다. 자아는 외부세계를 향해 돌진하는 죽음의 과정을 통해서 결국 자아의 본질을 알게 된다. 따라서 외부의 한계와 죽음은 나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한 나의 부분이다. 나는 외부의 한계와 죽음에 대한 본질적 의미를 알게 됨으로써 진실을 얻는다. 그 과정에 시간(역사)이 필요하다.

작가(자아)는 세계를 바라보고 내린 해석(결론)을 시각적 언어로 사유한 사상가이다. 우리나라 작가는 세계 모두를 해석하고 비판할 수 있는 자유를 인정하고 있다. 다만 미술계와 미술계에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본권력 • 제도권력에 대한 비판만큼은 용인하지 않는다. 따라서 수장가와 미술관만큼은 작가의 비판을 비켜가는 오아시스이다. 이 오아시스의 정체와 본질을 파헤치기 위해서 오히려 스스로를 비판하며 부정하고 재고하는 과정이 바로 『제세동기(defibrillator)』가 지닌 메타포이다. 오아시스의 실체가 묵과되고 끝없이 안정적 존속을 이어갈 때 작가들은 알 수 없는 ‘잔떨림’의 고통을 끝까지 겪게 된다.

작가가 자기 인생의 의미를 알고자 세계에 자의식을 투사하고, 이 투사된 사고가 시각적 옮김(visual transferring)을 통해 매체에 드러난 현상을 가리켜 우리는 작품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자기 인생을 거는 작가, 세계의 의미를 묻고 그 물음의 대답을 끝없이 추구하는 작가, 그 물음을 물리적 매체로 훌륭하게 이동시킨 작가를 우리는 훌륭한 작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기본적 물음으로 작가를 대접하지 않는다. 자본력이 있고 그럴듯한 기획력을 갖춘 자본 화상이나 권력 미술관이 세례를 해주고 자격을 부여해준 소수만이 인정을 받는다. 서구의 작가를 모방했거나 미적 표면을 그럴듯하게 꾸민 작가를 걸러내지도 않는다. 더군다나 수장가들은 이러한 복잡하고 어려운 사고과정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가격이 오를 것 같다는 몇 가지 작은 정보에 의존하여 작품을 구입한다. 그런데 가장 악질적인 ‘잔떨림’의 제공자는 우리 모두의 뇌리 속에 파묻혀있는 사대주의다. 진정성(authenticity)의 의미를 치열하게 묻지 않은 채 표면만을 학습한 우리 모두의 잘못은 기본 중의 기본 덕목을 무너뜨렸다. 자본가 • 미술관 • 갤러리는 진정한 길을 걷는 작가들을 선택하지 않고 서구에서 잘 되는 외부작가를 수입하거나 서구에서 잘 적응하는듯한 국내작가에 환호한다. 그렇지 않는 작가들은 모두가 ‘잔떨림’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 ‘잔떨림’이라는 ‘세동’을 제거하여 겨우 생명유지를 도와준 전기충격에 대해 나열하자면 가끔 싸게 사준 미술관 작품구입비의 명목과 한정된 국가의 전시지원비, 그것도 아니면 개인적 아르바이트나 지인의 작품구입이 전부였다.

따라서 이번 전시 『제세동기(defibrillator)』는 작가들이 이 기구를 몸으로부터 떼어버리자는 제안이다. 이 기구를 뗄 수 있으려면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두려움의 해소는 철저한 자기 앎에서만 가능하다. 자기 앎은 세계에 채찍질을 해보고 반성적으로 자기가 누구인지 알게 된 사람들이다. (더욱이 자기는 자기를 알 수 없다는 사실까지 정확히 본 사람들이다.) 세계는 당연하고 자기의 본질까지도 인식하려는 작가들에게 두려움이란 실로 작은 사소한 것이다.

출품작가는 강우영 금민정 김선태 김은숙 김준 박준범 박혜수 손종준 송민철 이문호 이예승 최성록 추영호 하태범과 같이 모두 14명이다. 나는 이들 대부분의 작가의 작품을 최근 5년간 자세하게 바라보고 있다. 모두가 기구를 떼어도 될 만큼 진지하고 옹골진 기세가 있다. 따라서 작가 하나하나에 대한 미학적 • 예술학적 분석을 시도하고 싶다. 그러나 작은 지면이 허락하지 않아서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다만 이번 전시회를 기획한 이원호 • 이창훈 • 신형섭 작가가 생각하는 우리나라 예술계의 미래상에 대해 간단하게 밝히고 싶다. 예술가들이 특정 지역에 모이면 특정 지역이 예술화되고 예술화된 특정 지역은 반드시 거대자본에 잠식되어서 혜택을 받지 못한 다음 세대의 예술가들은 또 다른 세력과 연계하여 새 지역을 추구하게 된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예술가들의 숙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계의 초기과정에서 반드시 새로운 담론(혹은 패러다임)과 미술현상이 벌어지곤 했다. 장기적으로 흐를 공산이 큰 우리의 경기침체 디프레션은 향후 기존의 질서에 많은 영향을 줄 것이다. 현재 기량이 물올라 가고 있는 4 • 50대 작가들은 새로운 진실을 발견하고 있다. 추상표현주의니 미니멀리즘이니 하는 커다란 언어게임(big language game)은 앞으로 존재할 수 없다. 작은 언어게임(small language game)만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각자가 작은 게임만을 벌이는 가운데 참된 묘미가 드러날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부수고 부정했던 모든 가치와 형식들이 실은 나를 살린 나의 부분이자 자양분이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깨달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게임이 바로 그것이다. 이 참된 묘미가 있는 스몰 볼의 진원지가 앞으로 연희동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공룡의 게임은 더 힘 센 공룡에 의해서 종식된다. 최고로 힘 센 공룡은 그 밑에 있는 공룡들이 소멸될 때 자연스럽게 소멸된다. 멀지 않은 미래에 연희동은 공룡이 서식지가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들의 주거지가 될 것이다. 따라서 이번 전시회를 가능하게 해준 갤러리 L153과 이 전시에 참여한 14명의 작가들, 그리고 앞으로 참여할 모든 참된 작가들의 가는 길은 옳아 보인다. 그래서 그들의 미래를 응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