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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lo Exhibition /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TIMELESS

지아가가 갤러리 Giagaga Gallery
2023_0615 – 2023_0715

개념(槪念)이라는 사전적 의미는 특정한 사물, 사건의 현상이나 상징적인 대상들의 공통된 속성을 추상화하여 종합화 한 보편적 관념, 다시 말해서 각개의 사물로부터 공통적, 일반적 성질을 뽑아내서 이루어진 표상(表象)을 개념이라 한다. 개념미술은 본디 미술 작품의 유형적인 측면보다는 무형적인 측면을 중요시하는 미술이며 작가의 신념과 발상이 중요한 요소를 가진다.

이창훈 작가는 학부시절 조소를 전공하며 물성과 재료에 관한 궁금증으로 지속적인 탐구와 본질적인 관념을 고민하던 중 국제적인 전위예술운동인 독일의 “플럭서스(FLUXUS)”정신에 매료되어 동경하던 독일행을 결심한다.

내재되어 있던 본질적인 동양사상은 독일에서 표출되었고 사회적 현상의 근본적인 질문들이 화두가 되었으며 무(無)와 유(有) 그럴싸하게 보이는 작위적인 질문들에 한계를 느끼게 된다.

겉치레 형식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기반성과 자신의 작업을 의심하면서 방향성을 선회하고 또 선회하며 주변의 관계성과 닿아 있지 않은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의 정신적 세계 속에 빠졌다고 생각하여 독일 유학 후반부에는 현실에 대해 본질적인 주제를 찾는다.

보여 지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의 주제는 크게 바뀌지 않았으나 소재를 현실에서 보여 지는 것에 찾으려고 하면서 주변을 둘러보게 되고 하고 싶은 이야기들의 귀결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반문하며 결국에는 시간에 대한 것들을 인지하는 공간속에 있는 시간들을 인지하는 것들이 가지는 것. 그것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_2023_냉동고, 얼음(한강물), 분재, 목재 좌대, 수반, 그릇_가변크기
Time doesn’t flow_2023_freezer, ice(watr of the han river), bonsai, wooden stand, suiban, bowl_variable size

삶이란 시간의 흐름에 얹혀서 가는 것이니까.

현실에 보이는 시간들을 모으고 싶었다. 우연히 폐쇄 되어있던 동물 질병관리본부에 방문하게 되었고 사람들이 떠나고 고립되어지고 진공상태로 멈춰버린 그 공간속에 시간에 대한 축적을 보여주는 달력이라는 오브제를 목격한다.

보여 지지 않는 시간성을 가지고 와서 어떻게 보여줄지 고민하였고 그 때의 냄새와 느낌들을 포집기로 공기를 감각적으로 모아서 사람들에게 시각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포집기의 제습의 원리를 이용해 물을 모으기로 한다.

이창훈 작가의 얼음 작업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진공상태의 시간의 축적

물이 기체가 되고 고체가 되고 다시 액체가 되는 순환반복과 맞닿아 있는 있음과 없음의 우리 삶의 이야기들을 이창훈 작가는 이 작업을 통해 들려주고자 한다.

보이지 않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들의 진공상태의 응집이 누구에게는 흐르는 시간으로 누구에게는 흐르지 않는 시간의 개념으로 어쩌면 새롭게 맞이하는 제 3공간의 이번 전시에서 각자가 느끼는 시간을 감각적으로 다시 한번 마주하기를 바란다.

giagagagallery

전시관경 installation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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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hibition /
공동의 공동 Communal Void

Exhibition Artist : 박준범, 송민철, 이원호, 이창훈 / Junebum Park, Minchul Song, Wonho Lee, Changhoon Lee
Coordination : 김은숙 Eunsook Kim
Cooperation / Critic : 이주연 Jooyon Lee
Exhibition Period : 22.Nov – 10.Dec.2023
Closing Invitation : 9.Dec.2023 / 17:00
Open : 12:00 – 19:00 / Close : Sun & Mon
Support : Finepaper Gallery / Gyeonggi Cultural Foundation
Venue : 화인페이퍼갤러리 / www.finepapergallery.com

공동의 도시, 도시의 공동

무채색의 흑과 백으로 구별돼 보이는 꽃병 또는 마주 보는 사람의 옆얼굴. 대부분의 우리가 모르기 힘들 정도로 이 그림은 정말, 매우 익숙하다. 그림이 묻는 것은 한결같다. 무엇이 우선으로 보이는가. 어느 것을 형체의 상(figure)으로 보고 어느 것을 배경(ground)으로 삼는가. 어떤 것을 객체의 주로 삼아 다른 것을 배경이라는 부로 간주하며 이렇게도 보고 저렇게도 보게 된다. 질문을 다시 고쳐 던져본다. 이 그림을 그릴 때 무엇을 그리고자 했는지. 흑백의 그림은 꽃병과 사람의 얼굴을 동시에 그린 것이 아니다. 분명 꽃병을 그렸거나, 아니면 서로 마주 보는 사람을 그렸을 것이다. 둘 중 하나를 그리니 그리지 않은 다른 하나가 새삼 존재하게 되었을 뿐이다. 어느 하나를 지우면 나머지는 지우지 않았음에도 사라진다. 그리지 않았는데, 지우지 않았는데도 존재했으나 부존재한다. 의도와 상관없이 인과관계의 상관을 넘어 상호보완의 절대적 존재값이 서로에게 지워져 있다. 정말, 매우 상대적이며 공평하게 상호의존적이다.

도시건축 분야에선 프로젝트 구역 안 위치를 점하고 있는 건축물을 검은색으로 단순하게 표현하는 흑백 도면(Black-White 또는 Figure-Ground Map)을 흔히 활용한다. 검은색의, 대부분 네모진 고형(Solid)의 형체들은 건축물의 존재감 – 배열, 간격, 규모, 밀도, 이산 분포 등의 정도와 형태 즉 공간을 점유하는 양태 – 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동시에 그리고, 비로소 나머지 하얀 바탕은 공간(Void)으로 인식된다. 공간환경을 구성하고 있는 형태, 폭, 배열, 위계, 연결, 연속성 등 이를 주제로 강조해 보기 위해 흑백을 반전시켜 표현할 때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도면이 갖는 하얀 바탕이 그대로 공간이자 배경이 된다. 고형의 건축물이 얹혀진 대지는 건조물 외의 모든 공간을 틈새도 없이 메우고 있고 빛을 가득 담아 하얗게 하늘을 향해 열려있다. 건축가와 도시계획가는 이 도면 안에서 공간 이용자인 사람의 흐름과 동선의 이합집산을 가늠하고 시선과 시선의 교차, 만남과 헤어짐의 사회적 접촉과 교류의 가능성을 상상한다. 지붕을 인 사각의 고형(Solid)이 사적 공간으로 할애된다면 노천의 공간(Void)은 다중을 위한 공간으로 역할을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물리적으로 상호 간 연결되고 도시는 우리 모두의 공간이 된다.

2020년 새해의 시작과 거의 함께 Covid19 범유행은 전 지구적인 양상으로 번져 일상적인 공간 인지각의 범위를 벗어났다. 지구 단위의 공간 스케일을 걱정하기 익숙치 않고 감당하기는 더욱 버겁다. 도시행정은 발 빠르게 전염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감염의 위험으로부터 공동의 안위를 확보해야 했다. 이 공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집객시설이나 과밀이 우려되는 공간에 대한 통제가 행해졌다. 모두의 공간이 한순간, 그리고 한동안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 없이 출입과 이용의 제한이 적용됐다. 도시행정가였던 오스만의 파리 대개조계획을 통해 만들어진 지금의 길고 너르게 쭉쭉 뻗은 – 정돈된 가로수의 대로들을 통해 자유와 낭만의 도시로 오늘날 파리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크게 일조한 – 간선가로망이 공중위생의 대외 목적과 군중의 운집을 먼 시야에서 미리 파악, 와해하려는 이면의 목적을 가졌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과거의 유물이라 믿었던 개인에 대한 통제가 현대에 재현됨으로 대중은 상대적인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 도심의 활성화 측면에서 극도로 막으려는 공동화를 이때만큼은 인위적으로 조성해야만 했다. 물리적 거리두기가 사회적 거리두기였으며 이 모두를 포함해 다른 모든 분야와 측면에 공백이 번졌다. 모두에게 열린 공동의 공간이 우선 제어의 대상이 되는 모순된 상황이 동시대를 사는 지구인 모두가 공유하는 기억이 됐다.

모두로부터 ‘나’를 격리, 단절, 차단한다는 것은 부정적 행위가 아닌 권장되는 호혜이자 배려가 되었다. 사적 공간인 검은 고형의 네모 안 어디쯤 점으로 위치하고 ‘내’가 그 점 안에 있다. ‘내’가 작고 무력한 존재로서 이 상황을 감내해야 하는 긴 시간 동안 그래서 우린 차라리 ‘나’에 집중했던 모양이다. 무력감 또한 ‘나’에게 있어 재난이었고 이를 비껴가기 위해 나의 자존감과 정체성을 받치고 있는 네 개의 벽면은 ‘나의 공간’이자 은신처로 그 역할이 어느 때보다 뚜렷하게 돋보였다. 이 기간 동안 인테리어와 리모델링 수요가 어느 때보다 호황을 누렸다는 사실과 중고자동차의 판매율 증가가 이를 반증한다. ‘나’를 담는 최소의 공간 단위였던 거다.

그러나 개별 공간 안 ‘나’의 동선이 겹치고 겹쳐 수많은 ‘나’로만 가득 메워지는 – 타인을 통해 ‘나’를 확인할 수 없어 생긴 공백이 공허감으로 커가는 – 무렵 심리적 임계 상황은 그동안 당연하게만 여겼던 외기를 다시금 필요로 했다. 잠시 나간 공터나 공원, 산책길에서 타인과 맞닥뜨리며 이마저도 괜찮은 것일까 염려하는 집단적 노이로제에서 벗어나긴 쉽지 않았다. 이 시기 옥상이나 마당이 있는 사람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이전에 한 점의 외기도 ‘우리 집’ 안으로 용납지 않으며 철통같이 닫힌 공간으로 사용하던 베란다를 외기를 접할 수 있는 공간으로 디자인하는 건축 사례가 이 무렵 소개되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외기로 충만한 열린 공간에서의 호흡이 그만큼 간절했고 중요하다는 것이 자명했으며 여유의 빈 공간은 무용의 공간이 아닌 통기와 통풍의 순환이라는 유용함을 내포한다는 것을 – 눈으로 봄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 몸소 체험하며 알게 되었다.

피할 수 없이 모두에게 주어진 상황이었기에 겪어냈다. 앤데믹으로 외부공간에서의 활동이 자유로워지며 심리적 침체로부터 구제되었다. 이 전시는 지난 3년여의 팬데믹 시기를 겪은 전 지구인 중 5명의 작가와 1명의 도시계획가가 경험의 교집합을 나름의 시선과 해석을 통해 작품과 기획, 글로 소고한 자리이다. 스페인 독감 이후 코로나19를 겪은 우리가 앞으로 이와 같은 상황을 다시금 겪게 될까? 다음을 미리 걱정하기에 우리는 찰나의 시간을 점하며 살고 있으니 늘보의 특별한 고민보단 하루살이의 예사로운 주변 정리처럼 이 전시를 공모하여 준비하였다. 재택과 자가격리의 시간 동안 깊어지거나 넓어진 사고의 이면 숙달된 화상회의, 디지털 데이터 전송과 빠른 피드백, AI 기술 활용 등 밤낮의 시간과 이동 중 장소를 가리지 않게 되며 민첩한 진행에 큰 도움이 되었다.

도시계획가 이주연

리베라 메 Libera Me_2007_C-print_20x25cm x36, 40x60cm

광장은 보이지 않는 이상과 현실, 자유와 억압, 화합과 갈등 등이 끊임없이 전이하며 공존하는 불안한 경계이다.

슐로스플라츠(schlossplatz)는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중심부에 있는 넓은 광장이다. 이곳에선 그 해가 저물어 가는 시기 매년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린다. 작품 <리베라 메>는 2006년 작가의 유학 시절, 이 특별한 시공간에서의 순간의 감상을 특정한 표상을 통해 기록한 것이다. 광장, 그 중앙에는 콩코르디아 동상이 우뚝 솟아 있다. 그 아래 수많은 인파들이 모였다가 흩어진다. 콩코르디아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화평의 여신으로 일치, 화합, 조화를 상징한다. 동상의 손에는 월계관이 들려있다. 작가는 우연히 가지고 있던 필름 카메라로 이 정지된 동상의 손을 36번 반복 촬영했다. 그러나 작가의 호흡과 손 떨림 등으로 동상의 손은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기록되었다. 즉 촬영의 주체인 작가의 움직임이 정지된 객체에 전이 된 것이다. 이렇게 애니메이션화된 36장의 스틸 이미지들은 전시장 공간에 수평적으로 전시된다. 그리고 이 정지된 이미지들의 감상을 위해 다시 관객들은 자신을 움직여야 한다. 이미지들 속 여신의 손에 쥐어진 월계관 또한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어질 듯 말 듯 하며 허공을 부유한다.

전시관경 installation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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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hibition /
와르르, 우뚝

개나리 미술관 Gaenaree Gallery
2023_0214 – 2023_0219
큐레이터 / 김현경
후원 / 춘천문화재단

마혜련, 박레트, 서슬기, 이창훈, 장승호, 장오경

<와르르, 우뚝>은 개인이 지닌 다면성을 조명하는 전시다. 전시에선 ‘나’를 구성하지만, 미처 지각하지 못했던 영역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이를 위해 기획자는 반복되고 습관화돼 굳어진 감각 과정을 무너뜨린 뒤 ‘나’를 다시 세워보는 방법을 택했다. 참여 작가들은 자신의 도구를 통해 개인을 둘러싸고 영향을 끼치는 요소들을 조각내고, 흩어진 조각을 다시 모아 ‘나’를 세워보게끔 한다.